
- 소련의 초대 서기장이였던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2.21 ~ 1953.03.05).
1879년 캅카스 조지아(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Gori)에서 태어났다. 별명으로 '인간백정'(1),'강철의 대원수'로 불린다.-
1879년 캅카스 조지아(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Gori)에서 태어났다. 별명으로 '인간백정'(1),'강철의 대원수'로 불린다.-
1917년 스탈린이 전국 무대로 진출하며 (2) 볼셰비키 지도부의 최측근 권력집단의 일원이 되었고 7년후 즉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3) 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는것은 천천히 또 강하게 이루어졌다.
1919년 그는 두번째 공직으로 노동자 - 농민 감시단장 직을 맡았고 곧 1922년 당 총간사 자리에 오르며 곧 출세의 계단을 밞기 시작했다. (4) 그 권력은 1924년에 레닌이 죽은 뒤 벌어진 당내 논쟁에서 그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큰것이였을 분더러 좌,우파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1927년부터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써 확고하게 기반을 잡았다.
- 소련의 5개년 공업화 계획 장려 포스터 -
1928년 스탈린은 야심찬 5개년 공업화 계획을 수립했다. "자본주의 세계를 따라잡고 추월하기 위해"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하여 전체 공업 생산을 250% 늘리고 중공업 생산을 330% 늘린다는 계획을 잡았으며 농업생산도 집단화를 통해 150% 증가시킨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우크라이나는 5개년 계획 추진 거점으로 부상(浮上)하였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중 건설된 약 1.500개의 공장 중 400개가 우크라이나에 건설되었으며 전체 투자 재원의 약 20%가 우크라이나에 투입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석탄,철광석,철강의 주공급지로 부상했으며 이로써 1932년 기준으로 소련의 석탄,철광석,선철의 70%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었지만 완제품이나 경공업 제품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소련정부가 발표한 통계는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지만 1차 5개년 기간동안 전체적으로 공업생산량이 50% 정도 증가하여 소련은 주요 공업국 반열에 들어 들어서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석탄 생산량은 3.500만톤에서 6.400만톤으로,석유 생산량은 1.100 만톤에서 2.100만톤으로,철강 생산량은 700만톤에서 1.200만톤으로, 선철 생산량은 300만톤에서 600만톤으로 각각 2배 가까이 늘어났다.(5)
- 소련 공업지대 중의 하나인 kombinat.
서로 관련이 있는 몇 개의 기업을 결합하여 하나의 공업 지대를 이루어 생산 능률을 높이는 합리적인 기업 결합이다. -
서로 관련이 있는 몇 개의 기업을 결합하여 하나의 공업 지대를 이루어 생산 능률을 높이는 합리적인 기업 결합이다. -
2차 5개년 계획 기간 (1933 ~ 1937년)에는 산업의 기술적 재편과 교통수송,집단화를 통한 농업 생산 증대와 산업의 중앙통제 완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2차 5개년 계획의 중심거점이 우랄,시베리아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건설된 약 4.500개의 공장 중 우크라이나에 건설된것은 천 개 정도였다. 그러나 도로망과 자동차 등은 크게 늘어나 1928년 3.900km 였던 우크라이나의 기간 도로는 1930년 13.700km로 늘어났으며 자동차는 1만 1천대(1932년)에서 8만 4천대(1937년)로 늘어났다.
1,2차 5개년 계획 기간 (1928 ~ 1937년)을 합쳐서 기계 및 금속 생산은 6.1배 증가하였고 화학비료는 17.7배,전기 생산은 9.8배,산업용 목재 생산은 5.2배 증가하였으나 경공업재 생산은 3.4배 밖에 늘어나지 않았으며 이 중 식품 가공 부분은 1.4배 증가하는데에 그쳤다.
급격한 공업화는 우크라이나 사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농업 지역이였던 우크라이나는 공업이 주산업으로 부상하였으며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 수급을 위해 농촌 지역 인구가 대규모로 도시로 이전하여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1926년 540만명 이 였던 도시인구는 1939년 1.100만을 넘어섰으며 도시 인구 구성도 변화하여 1920년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체 도시의 차지하는 비중은 32%였으나 1939년에는 58%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1,2차 5개년 공업 계획을 통하여 중공업(군수 공업)을 크게 늘렸으며 이는 나중에 미국과 초강대국 자리 싸움을 하는 주춧돌을 성공적으로 놓았다. 하지만 이 공업계획의 뒷면에는 무고한 농민들의 수많은 피와 살덩이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농민들은 급격한 공업화의 제물,희생양 이였던 것이였다.
-To be continued-
(1) 스탈린의 학살은 현재 KGB(소련 첩보기관),대통령 문서고의 비밀 헤제된 기밀문서의 추정에 의하면 스탈린 사후까지 1900만 ~ 4000만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어디까지나 추측,주장일뿐이며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다.
(2) 그 전에는 혁명 활동가가 되어 은행을 털어 정치자금을 마련했으며 그는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운 좋게 처형은 면했고 서른 일곱살이 되던 1917년에 그는 폭넒은 경험을 가진 혁명가,직업상 선동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출현했다.
(3) 레닌은 1922년 12월에 쓴 마지막 유언장에서 스탈린에게 권력을 맡기기에는 지나치게 거칠고 참을성이 없다고 스탈린을 비난했다.
(4) 1920년대 말 무렵에 당 기관지들은 그를 간단하게 보즈드(vozhd) 즉 영도자라는 용어로 칭하기 시작했다.
(5) 소련 공업 생산량에 관한 서구의 최신 연구는 여전히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소련 전체의 공업 생산량은 1928년에 4.300.000 톤이던 철강 생산량이 10년 뒤에는 18.100.000 톤으로 상승했고 석탄 생산량은 35.000.000톤에서 133.000.000톤으로 늘었다.




덧글
'비교적'쉽다는 건 대강..... 100점 맞는 거에 비해 90점 맞는게 더 쉽다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정확할 듯합니다.
묵념.....
반항시 즉결총살 아니면 모진 고문후에 시베리아행 화물열차에 던져서 넣어졌으니까요.
이가 갈릴만듯 할겁니다..... 인간 대백정이였으니까요...
윗 포스팅에 올린 추정치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스탈린 사후 50~100만명 정도가 시베리아에서 행방불명 처리된것까지 합하면.....
곧 죽음과 다이렉트로 연결됬습니다.(굴라그로 넣어 죽이든 즉결 총살을 시키든 고문사를 시키든....)
말 그대로 농민들을 갈아넣은 공업화였죠...
ps. 독제 -> 독재
아니 카자흐스탄 지방까지요..
.....
(훗날 독소 전쟁 와중에 트렉터 공장이 전차 공장으로 전용되었다는 말도 생각나고 해서리...)
딱 20만대의 트랙터들이 있었네요. 흐으음...
그리고 현대 와서도 석유는 톤으로도 계산하잖아요 ㅇㅅㅇ;;;
일단 더 찾아볼께요!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쪽의 발빼기..일 측면도 적지않죠
요컨데
'야 너희만 희생자냐? 우리가 제일 희생크니까 짜져라.,,'이런 측면도 없진 않죠
지금도 러-우 관계가 아주 좋은것만은 아니니...
2. 당연히 중공업을 추진할만한 기술이나 자본이나 시설이 비약한 상태에서 급격하니 추진하니 당 내에서도 우려하는 바가 없잖았는데 스탈린은 숙청 외에도 '외국의 위협'을 언급하며 이를 억눌렀습니다. 이건 의외로 잘 먹혔다는군요.(아마 1차대전때 제정 러시아가 공업기반 미약으로 전쟁물자를 제대로 못구해서-무려 일본에서 소총과 탄약을 사올 정도-쩔쩔멘 기억 덕분인듯)
2. 1920~1930년대 당시 외국의 위협이 절정에 달했는데 영국대사가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 국민당이 같은편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을 했죠.
ps. 답글이 늦었군요 죄송합니다.